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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7-02)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

에스겔 17장 11-24절


 

평화와 축복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징후 일뿐 만 아니라 그분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징계를 통해 우리는 내면과 인생에서 겸손하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견딜 수 없다면, 우리는 더 큰 고통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제 사업을 거부하면 더 깊은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과 희망을 약속합니다. 그의 징계는 궁극적으로 갱신과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 비유와 수수깨끼로 선포된 메시지에 대한 해석이 주어집니다. 바벨론 왕에 의해 세움을 받았음에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애굽을 찾은 유다 왕은 배반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겠지만, 애굽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명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파기한 유다 왕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비유의 해석(11-21)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지 그들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비유로 그 뜻을 전하였지만, 사람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에스겔에게 비유를 풀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1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너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13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14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거늘 15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16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17대적이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 주지 못하리라 18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19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20그 위에 내 그물을 치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에서 심판할지며 21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11-21)

 

인간적 동맹은 결코 믿을 수 있는 카드가 아닙니다.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하며 세상 가운데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2b-21절이 비유와 수수께끼의 해석입니다. 12b-18절은 역사적 시점에서, 19-21절은 신학적 시점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줍니다. 비유와 그 해석이 모두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 해석의 도입부(11-12a)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말하라(2)고 에스겔에게 선포의 과제를 위임하신 여호와께서 이번에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까?’하고 묻고, 그 의미를 전하게 하십니다(12a). 비유와 그 해석이 유다의 마지막 왕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를 들어야 할 대상은 ‘반역하는 족속’이 된 ‘이스라엘 족속’입니다(12:9). 현재의 문맥에서 ‘반역하는 족속’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유배민들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빠른 귀향을 고대하던 유배민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 왕궁의 반(反)바벨론 정책에 동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맞서 에스겔은 바벨론을 섬기는 것이 여호와의 뜻으로, 이스라엘 족속의 유일한 살길임을 선포합니다.

 

(2) 바벨론의 개입(12b-14)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유다 왕을 사로잡아 가는 12b절은 3b-4절의 해석이고, 바벨론 왕이 다윗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와 언약을 맺어 새 왕을 세우는 13절은 5절의 해석입니다.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벨론 유배에 관한 말씀으로, 열왕기하 24:10-17에 비교적 자세히 보고됩니다. 여호야김의 배반을 징벌하기 위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아마도 그 직전에 죽은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항전을 포기하고 태후와 신하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느부갓네에게 항복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과 상당수의 지배 세력과 수공업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여호야긴의 삼촌이자 요시야의 아들인 맛다니야를 왕위에 앉히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꿨습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서만 시드기야의 왕권을 저주의 맹세가 수반된 언약(조약)으로 언급합니다.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는 직역하면 ‘그를 저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세울 때 그와 언약(조약)을 맺고 그에게 언약 파기에 따른 저주를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 땅의 능한 자들'은 12절의 고관들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정치·사회·종교 지 도자들을 포함한다.

 

(3) 유다 왕의 배반(15)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정치적 배반을 다루는 14절과 ‘배반하였으니’까지의 15a절은 각각 6절과 7절의 해석에 해당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높이지 않으면, 바벨론과 맺은 봉신조약을 준수하면 유다 왕국은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선택은 언약의 준수가 아닌 언약의 파기였습니다. 그는 바벨론 왕에게 반역하고 애굽으로 사절을 보내 군마와 많은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의 굴레를 벗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맹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파기한 자가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15b).

역사적으로 보자면, 큰 물가 비옥한 땅에 심긴 포도나무의 줄기와 뿌리가 방향을 돌려 향한 두 번째 독수리는 애굽 왕 바로 프삼메티쿠스 2세(Psammetichus II, 595-589)를 가리킵니다. 프삼메티쿠스 2세는 주전 592년에, 아마도 반바벨론 정서를 부추기려고, 팔레스티나 페니키아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전통적으로 애굽에 우호적이었던 예루살렘 왕궁은 애굽의 적극적인 개입에서 바벨론과의 봉신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주전 589년 야망에 찬 호브라(Hophra, 589-570)가 프삼메테쿠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시드기야는 공개적으로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4) 배반의 파국적 결과(16-18)

 

시드기야의 배반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을 여호와께서 당신의 생명을 두고 엄중하게 선언하십니다. 시드기야는 자기를 왕위에 앉힌 바벨론 왕이 있는 곳에서 죽을 것입니다. 서두에 놓인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는 시드기야의 운명이 여호와에 의해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음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와 바벨론의 봉신 관계가 여호와의 의지에 속했음을, 곧 시드기야의 정치적 배신이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시드기야가 유배와 죽음의 재앙에 넘겨지는 이유가 16절과 18절에 동일한 표현으로 두 번 제시됩니다. 그가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그 앞에서 한 맹세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는 봉신조약을 폐기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19).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바벨론 원정군이 공격 축대를 쌓고 공격 보루를 만들 때, 애굽 왕 바로의 강한 군대와 많은 병사가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애굽은 유다와 바벨론의 전쟁에 군사적으로 한 번 개입합니다. 주전 588년 초여름 애굽 왕 바로 호브라가 바벨론 군대에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에 나서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고 군대를 이동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해방은 일시적이었다. 호브라의 원정군은 바벨론 군대에 참패를 당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이후 애굽은 더는 국경을 넘어 간섭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고립됐습니다.

 

(5) 여호와의 심판(19-21)

 

다시금 여호와께서 언약을 파기한 시드기야의 정벌을 선언하십니다. ‘그가 무시한 나의 맹세와 그가 깨뜨린 나의 언약-나는 그의 머리 위에 그것을 갚으리라’(19절의 사역). 특이하게도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와 맺은 언약과 그의 맹세가 여호와의 언약과 그분의 맹세로 불립니다. 봉신 조약이 여호와의 언약이고 바벨론 왕 앞에서 한 맹세가 여호와 앞에서 한 맹세이기에(고대 세계에서 조약을 맺거나 맹세를 할 때 신들 의 이름이 증인으로 사용되기에), 조약의 파기나 맹세의 무시는 참여한 신들을 무시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고대 전통 이상의 신학적 전망에서 이를 사용합니다. 그는 유다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임을 보여주기 위해 봉신 조약을 여호와의 언약으로 주장합니다. 이 경우 조약을 파기한 시드기야의 배반은 역사를 경영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의 통치권을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바벨론 왕과 맺은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바벨론에 끌려가 죽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와 맺은 약속을 깨는 것은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맺은 약속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맺은 약속도 잘 지키고 있습니까?

 

다윗 왕조의 영광스런 회복(22-24)

배신자들은 보통 눈앞의 이익을 좇습니다. 배신하는 순간에는 이익인 것 같고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배신자의 최후는 항상 비참하고 초라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에 대한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24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22-24)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참 통치자이심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유다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이스라엘을 회복하며 구원하실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1) 백향목의 비유(22-23)

 

여호와께서 백향목 꼭대기에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 위에 심으시면,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긴 가지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에 온갖 새들이 깃들며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들의 모든 나무는 생사화복이 여호와의 주권적 능력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2) 생사를 결정하시는 여호와(24)

 

현재의 문맥에서 22-24절의 예언은 시드기야의 유배와 죽음으로 다윗 왕조가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포도나무(5-8)가 아니라 백향목 가지(3-4)에서 새 순이 돋는 것은 다윗 왕조의 회복이 바벨론으로 유배당한 여호야긴 또는 그의 후손을 통해 이뤄질 것을 시사합니다.

주전 597년 바벨론으로 유배당한 자들이 하나님 백성과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합니다. 24절은 다윗 왕조의 회복 약속에 회의적인 자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배신한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될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보여주며, 우리의 회개와 돌아옴을 기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약속을 주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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